사랑은 아무나 하나
노명현 장로
이것은 어떤 유행가의 제목이지만 일부러 이 글의 제목으로 선택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랑이란 단어일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친숙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지 한 번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곡해하고 있는 것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라고 사랑의 발원지는 하나님이시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라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술가도 자신이 만든 작품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우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시겠는가?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사랑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단순히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에 머물 뿐이고 사랑을 행할 수 없다. 사랑을 체험함으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간다.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시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하시더니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눅6:27)고 하시는데 까지 나아가셨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가능하겠는가? 결국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체험이 일어날 때 가능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저절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selfish)인 존재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후로는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죄악의 근원이다. 또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본성이 이기적인 인간이 교육과 훈련에 의하지 않고는 인간은 이타적(altruistic) 존재 즉 남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연히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이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인 미움, 다툼, 시기, 질투, 교만, 탐욕은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런 감정이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이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을 억누르고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명령들을 보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서로 화평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삼가 탐심을 뮬리치라’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하나라도 저절로 되는 것이 있는가? 특히 모든 긍정적인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인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 사랑의 수고를 통한 습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서 실례를 보자.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몸에 베인 사랑으로 강도 만난 자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우리도 강도 만난 자를 만나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 보살피고 베푸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몸에 익숙해져야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이 체질화될 때 소외된 자, 병든 자, 장애인, 노약자, 소년소녀 가장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으로서 주셨음을 깨닫게 되고 그들에게 저절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에 대한 참된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가치의 척도이다.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테레사 수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존경만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자로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다. 결국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을 통해 받은 사랑을 다시 이웃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명현 장로
이것은 어떤 유행가의 제목이지만 일부러 이 글의 제목으로 선택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 중의 하나가 사랑이란 단어일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이란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친숙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왜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지 한 번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곡해하고 있는 것 두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4:7)라고 사랑의 발원지는 하나님이시라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라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기에 피조물인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술가도 자신이 만든 작품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신 우리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시겠는가?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그분을 영접함으로써 사랑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고 그분의 사랑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는 단순히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에 머물 뿐이고 사랑을 행할 수 없다. 사랑을 체험함으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행할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점차 그 정도를 더해간다. 처음에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하시다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22:39)고 하시더니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눅6:27)고 하시는데 까지 나아가셨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가능하겠는가? 결국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실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는 체험이 일어날 때 가능할 것이다.
사랑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저절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 속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selfish)인 존재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후로는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죄악의 근원이다. 또한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사랑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또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본성이 이기적인 인간이 교육과 훈련에 의하지 않고는 인간은 이타적(altruistic) 존재 즉 남을 사랑하는 존재로 변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연히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이 우선적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부정적인 속성인 미움, 다툼, 시기, 질투, 교만, 탐욕은 아무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런 감정이 이미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이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속성을 억누르고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명령들을 보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서로 화평하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삼가 탐심을 뮬리치라’라고 가르치고 계신다. 그러나 이 중에서 하나라도 저절로 되는 것이 있는가? 특히 모든 긍정적인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인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기 위해서는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을 넘어 실제 생활에서 사랑의 수고를 통한 습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성경에서 실례를 보자.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관념적인 사랑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몸에 베인 사랑으로 강도 만난 자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던 것이다. 우리도 강도 만난 자를 만나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 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웃에 관심을 갖고 그들을 돕고 보살피고 베푸는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훈련을 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몸에 익숙해져야 될 것이다. 이러한 삶이 체질화될 때 소외된 자, 병든 자, 장애인, 노약자, 소년소녀 가장 등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우리들의 사랑을 실천할 대상으로서 주셨음을 깨닫게 되고 그들에게 저절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에 대한 참된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남을 위해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가치의 척도이다.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테레사 수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의 존경만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자로서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다. 결국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분을 통해 받은 사랑을 다시 이웃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생활화된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