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

  • 이금용
  • 조회 4882
  • 일반
  • 2011.01.13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시골길을 가로지르는 고물차 꽁무니를 따라 뿌연 흙먼지가 요란스럽게 일어난다. 치열한 전투 후 폐허와 죽음만이 즐비한 격전지처럼 수마가 훝고간 한림의 들판은 아직도 일그러진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인간이 내뿜는 공해로 이상기후가 이젠 아예 당연한 기후가 되어버린 탓인지 지난 장마 이후로 더 많이 쏟아져 내렸던 비와 그 뒤를 이었던 때늦은 태풍은 평화롭던 마을을 사정없이 휩쓸고 지나갔다.
 
한밤중 당했던 재난 속에서 집이 무너지고 가축이 죽고 푸르던 들판은 물에 잠겼다. 땀방울로 가꾸어왔던 소중한 터전이 하루아침에 상전벽해로 변해버린 것이다. 좌절과 울분 속에서 몇 날이 지나고 드디어 물이 마르면서 악취와 함께 드러난 처참한 광경 앞에서 모두들 망연자실 할 말을 잊었다.
 
엉망이 되어버린 진흙탕 가구들과 자기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토담집, 해골처럼 비틀어진 벼와 유실수들과 죽은 가축들 그리고 뼈대만 남은 하우스에 찢긴 채로 걸려있는 누런 비닐이 바람이 불 때마다 지난 밤 악몽을 떠올리 듯 몸서리를 치고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사랑의 손길 이었다. 군인들과 공무원 그리고 선한 단체들이 고맙게도 한 마음이 되어 팔을 걷었다. 매일 아침 마을로 통하는 도로에는 수해복구를 위한 차량들이 길게 줄을 이었다. 기독교단체에서 보내오는 구호물자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그들에게 격려와 실제적인 도움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특히 그 곳에서 같은 재난을 당한 교회들은 그들의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회자를 중심으로 마을 복구를 위해 선전하던 모습은 복음의 불모지에 주님 사랑을 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많은 시간 물속에 잠겼던 가구들 대부분이 쓸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더 건질 수 있을까 안타까운 마음에 봉사자들은 열심히 물로 씻고 수마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갑작스런 재난의 충격으로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동병상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현장에 가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이렇듯 자원봉사자들의 여름 내내 역겨운 악취를 감수해가며 구슬땀을 흘린 덕분으로 쓰레기더미의 도로가 정리되고 집이 청소되고 한림은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다.
                                     
                                      *

그러나 모든 것이 희망적인 것은 아니었다. 무너진 담들이 겨우 세워지고 이제 겉모양은 제법 멀쩡해 보였지만 저 넓은 들판에 풍요를 기대하던 초록생명들은 한번 피어보지도 못하고 허리가 접힌 채로 모두 죽어있었다.
 
아! 황금물결 사라져버린 이 들판에 이제 가을햇볕 종일 내리쬔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무리 결실의 바람이 불어온들 속 차게 익혀줄 과실이 있겠는가.
지난 봄 저 들판에서 파란하늘로 맑은 웃음 날리며 가을이면 행복하겠다던 주인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 아무도 없는 벌판에는 침묵만이 무겁다.
 
신토불이를 노래하던 사람들이 시골이 힘들어 떠나버린 이곳에서 그래도 고향을 지키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이 무슨 시련이란 말인가.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힘을 내었으면 좋겠다. 옛날처럼 막걸리 한잔으로 툴툴 털고 다시 일어났으면 좋겠다.
 
 '오늘만 날인가 저 넘어 봄이 오고 있지 않은가 그때에는 지금 슬픔을 잊고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지 않은가' 어깨를 감싸며 격려해 주고 싶다. 그러나 감히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언제나 말뿐이고 생각뿐인 우리들이 그네들의 아픔을 어디 반 푼이나 알겠는가 싶어서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지난여름, 우린 아픔을 다 알고나 있는 듯이 그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탓하며 간절했던 마음들은 다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안위에 열중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가 아닐지.

 '주님 용서하십시오.'
 
... 멀리 바람없는 들판에 누가 피웠는지 하얀 연기 가늘게 피어올라 슬픔되어 흩어진다. 차가 완만한 고개를 넘어 굽어진 길을 돌았을때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물에 녹아 썩어가던 나무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감나무가 혼신의 힘으로 물을 빨아올리며 다시 한 번 파란 싹을 돋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었구나!'
가슴에 쏴! 하는 감동과 함께 순간 일하고 계시는 주님을 느꼈다. 그 곳엔 눈물만이 아니라 지난 봄날 하늘로 피어나던 그 희망도 함께 있음을 깨달았다. 싹이 핀들 올 가을 단맛 흠씬한 열매야 있겠냐마는 생각해보면 너무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달리는 차 속에서 기도처럼 가만히 읖조려 본다. 한림이여 이제 힘을 내시라! 지금은 비록 눈물어린 낙담의 계절이지만 머지않아 이 들판 가득히 희망으로 채워주실 주님이 계시지않는가. 그 분이 도우시리라. 언덕 위 가을햇살 속에서 새한림교회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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