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영화)에 긍휼함을 품다

  • GT 박대봉
  • 조회 2338
  • 일반
  • 2006.08.1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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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인기가 뜨겁다. 벌써 ‘왕의 남자’의 1200만을 넘어서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 조심스럽게 나돌고 있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개념을 잘 정립했다는 말도 나온다.
그렇다. 영화 괴물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다. 한국형이라고 하는 것은 드디어 블록버스터에서도 한국형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어설프게 헐리우드 흉내 안내는 그런 영화라는 뜻일 것이다. 헐리우드식, 즉 때려 부수고, 물어뜯고, 불나고, 박살나는 이런 영화를 보면 속 시원하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그뿐이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어두운 공간에서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 먹고 오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영화 ‘괴물’은 마지막에 괴물이 처절하게 죽었는데도,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시원스럽지가 않다. 뭔가 석연찮은 느낌, 무언가 자신의 치부를 들켜버린 느낌이랄까? 아무튼 블록버스터를 보고도 개운치 않은 이 느낌, 이것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일까?

‘괴물’에는 진짜 괴물이 나온다. 그것도 처음부터 나온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맨날 꼬리만 보여주다 마지막에 비싼 얼굴 한번 보여주는 여타 영화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보여줌으로써 괴물을 결코 우리와 동떨어지게 하지 않고, 우리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이것이 ‘봉’감독을 높이 살만한 점이다. 왜냐하면 괴물을 우리의 일상과는 먼 곳에 숨겨 놓으면 괴물이 우리의 잘못으로 생겨났다는 당위성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숨길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를 해치우는 사람들도 평범한 한 가족이다. 결국 그것을 해결해야 할 몫도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정부는 헐리우드 영화처럼 결코 똑똑하고 영리하지 않다. 영웅들이 나타나서 진두지휘하며 괴물을 해치우지도 못한다. 그들은 늘 그래왔듯이 각본에 짜인 시스템에 의존하며 피해자인 소시민들을 그저 잡는다. 경험이 괴물을 잡는 것보다는 시민들을 잡은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대처능력을 나타내야 함에도 익숙한 시스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결국 괴물은 죽었다. 미국에서 들어 온 알 수 없는 단체의 약품 투여로 비실대다가 한국 데모대의 상징 화염병을 맞고, 쇠파이프 창에 맞아 죽었다. 속이 시원해야 되는데 그렇게 죽어가는 괴물이 왠지 측은하다. “그래 저 녀석이 자기가 저러고 싶어 저런 것은 아니잖아.” 미 8군에서 버린 맛없는 포르말린을 먹고 자란 물고기는 결국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괴물이 돼버린 것이다. 어쩌면 영화 ‘괴물’은 한 때 이슈가 됐던 미군부대 포르말린 사건을 등장시켜 그들을 용인한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미군뿐이랴! 이 나라 사람인 우리 스스로도, 한강이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아니 민족은 너무 거창하고 서울 시민으로서 서울의 젖줄이라고 말하는 우리 자신도 얼마나 환경을 생각하고 있을까? 세계 경찰을 자처하며 각국에서 파렴치한 일을 일삼는 미국을 원인 제공자로 내세우고 있지만 결코 우리 자신도 그 범죄의 산물 괴물 앞에서 당당하지는 못한다. 막말로 괴물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우리 앞에서 “너희 중에 한강에 오물 안 버린 사람이 나를 돌로 치라”고 하면 돌을 들어 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묵인해 온 수많은 죄악들은 결국 커다란 괴물이 되어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다. 괴물이 나타나서 한강 시민 공원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이리 저리 도망 다니는데 한 여자가 이어폰을 끼고 자리에 앉아 평화롭게 음악 감상을 하고 있다. 돌연 괴물에게 치이고 만다. 그게 현실이다. 부지중에 만들어 낸 괴물에 부지중에 당하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 그 때는 대처하려 해도 너무 늦거나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괴물이 어디 그뿐이랴! 우리는 이미 많은 괴물을 만들어 냈고 아직도 제2 제3의 괴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가 패륜아라 부르던 그들, 살인마라 부르던 그들, 인두겁을 쓴 악마라 부르던 그들이 모두 이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들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만 그들의 마지막 행위들을 모니터하고 그들을 정죄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이유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말이 옳다. 그러기엔 우린 너무 바쁘고 그것 신경 쓸 인정이 우리에겐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을 전달해주는 매체는 그것을 더 가중시킨다. TV를 통해 보는 사건 사고, 전쟁의 소식은 모두 같은 맥락이다. 그것은 그저 우리에게 한편의 영화일 뿐이다. 잠시 충격을 받지만, 그 뿐이다. 더 이상 알려고도 해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그것을 볼 뿐이다. 실제로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다고 해도 그것이 잊혀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는 크고 작은 다양한 괴물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 우리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긍휼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고 있는 죄에 대한 최소한 책임이자 양심인 것이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무관심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조심하시라! 오늘은 어떤 괴물이 당신을 노리고 있을지 모른다. 쿵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22- ( 갓피아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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